헤이지니 사태가 남긴 질문, 콘텐츠 제작 노동은 왜 '관계'에 기대어 무너지는가
헤이지니 사태가 남긴 질문, 콘텐츠 제작 노동의 위험 구조 | LDSCA 기고문
헤이지니 사태가 남긴 질문,
콘텐츠 제작 노동은 왜 ‘관계’에 기대어 무너지는가
키워드 콘텐츠 제작 노동 · 업무상 정신질환 · 포괄임금 · 직무스트레스 위험성평가 · 크리에이터 산업
2026년 10월 말, 구독자 413만 명의 키즈 크리에이터 헤이지니가 운영하는 회사의 전 직원들이 장시간 노동과 업무상 정신질환 산재 처리 과정의 갈등을 잇따라 공개했습니다. 회사는 공식 입장문을 내고 주요 주장을 반박했으며, 사실관계는 아직 다투어지고 있습니다.
이 글은 어느 쪽 주장이 옳은지를 판정하려는 글이 아닙니다. 그 판단은 노동행정과 사법 절차의 몫입니다. 다만 이 사건을 한 크리에이터의 문제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한빛 PD, 「킹덤」 미술 스태프, 이재학 PD, 오요안나 기상캐스터에 이르기까지 콘텐츠 제작 현장은 지난 10년 동안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받아 왔습니다. 본고는 이번 사태가 방송 제작 현장의 취약한 노동 구조가 크리에이터 산업으로 옮겨 와 더 작은 규모로 재생산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01.사건 개요: 다투어지는 주장의 구조
10월 26일부터 27일 사이 전 직원 A씨의 폭로와 다른 전 직원 B씨의 추가 폭로가 보도되었고, 27일 저녁 소속사 키즈웍스가 입장문을 발표했습니다. 같은 날 한 유튜브 채널을 통해 산재 신청 과정에 관한 양측의 통화 녹취 일부도 공개되었습니다. 보도된 내용을 쟁점별로 나란히 놓으면 차이가 분명해집니다.
근무 시작 시점부터 양측 진술이 엇갈리고, 공개된 녹취도 대화 전체의 맥락이 확인된 것은 아닙니다. 고용노동관서의 감독 결과나 법원 판단도 아직 없습니다. 따라서 아래의 분석은 특정인의 책임을 전제하지 않으며, 이러한 주장이 나올 수 있는 구조를 진단하는 데 목적을 둡니다.
02.처음 보는 장면이 아닙니다
헤이지니 사태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지난 10년 동안 콘텐츠를 만드는 현장에서 비슷한 장면이 거듭 반복되었기 때문입니다. 플랫폼은 지상파에서 OTT로, 다시 유튜브로 옮겨 갔지만 화면 뒤 노동의 조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쓰러지고 나서야 제도가 움직이는 순서도 그대로였습니다.
10년의 기록
2017년에는 크런치 모드 끝에 숨진 20대 게임 개발자가 사망 직전 한 주에 95시간 55분을 일한 사실이 확인되어 산재가 인정되었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업종과 매체는 다르지만, 마감이 사람의 시간을 집어삼키는 구조는 같습니다.
반복되는 결말의 네 가지 구조
첫째, 계약서의 이름이 법의 보호를 가릅니다. 이재학 PD는 14년을 일하고도 1심에서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오요안나 기상캐스터는 괴롭힘이 인정되었는데도 ‘근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법 조항이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같은 고통을 겪어도 프리랜서인지, 직원인지, 친구인지에 따라 보호의 두께가 달라지는 것이 콘텐츠 노동의 현실입니다. 2021년 지상파 3사 방송작가 조사에서도 363명 중 152명(41.8%)이 근로자로 판단되었다는 사실은, 무늬만 프리랜서인 계약이 예외가 아니라 관행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둘째, 사용자 측의 부정 논리는 놀라울 만큼 닮아 있습니다. 「킹덤」 제작사는 ‘이틀 쉬었으니 과로가 아니다’라고 했고, 청주방송은 ‘프리랜서일 뿐’이라고 했으며, MBC는 근로자성 인정의 ‘파장’을 우려했습니다. 이번 사안에서 A씨가 문제 삼은 것도 휴직 중 여행을 이유로 질병을 의심했다는 의견서 문구입니다. 해당 문구의 작성 경위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재해의 원인을 개인의 체력이나 성격, 사생활에서 찾는 논리는 업종을 가리지 않고 되풀이되어 왔습니다.
셋째, 입증의 부담은 가장 약한 사람에게 돌아갑니다. 포괄임금 아래에서는 노동시간이 기록되지 않고, 프리랜서 계약에서는 지휘·감독의 증거를 노동자가 모아야 합니다. 산재 문턱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근로복지공단 집계에 따르면 정신질환의 산재 인정률은 2021년 70.8%에서 2025년 56.0%로, 뇌심혈관질환은 38.6%에서 29.7%로 낮아졌습니다. 업무상 질병의 평균 처리 기간은 한때 227.7일까지 늘어났습니다. 아픈 사람이 7개월 넘게 자신의 아픔이 일 때문임을 증명해야 하는 구조입니다.
넷째, 구조는 더 작은 곳으로 내려가며 재생산됩니다. 방송사에서는 그나마 노조와 시민단체, 국정감사가 감시 역할을 했습니다. 크리에이터 제작사에는 그런 장치가 사실상 없고, 상시 4명 이하라면 연장근로 한도와 가산임금 규정조차 적용되지 않습니다. 감시가 없는 곳에서 문제가 드러나는 유일한 경로는 당사자의 공개 폭로이며, 그것은 대개 이미 몸과 마음이 무너진 뒤입니다. 이번 사태를 한 크리에이터의 일탈로 소비하고 끝낸다면, 다음 폭로는 다른 채널에서 같은 모습으로 나올 가능성이 큽니다.
03.위험요인과 재해 메커니즘
안전관리의 언어로 옮기면, 콘텐츠 제작 현장의 정신건강 재해는 추락이나 감전처럼 한순간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 위험요인이 겹쳐 회복 시간을 조금씩 잠식한 끝에 드러납니다. 이번 사건에서 제기된 주장들을 위험요인 단위로 나누어 보면 다섯 개의 층이 겹쳐 있습니다.
재해로 이어지는 경로와 ‘2차 손상’
직무스트레스 연구에서 널리 쓰이는 Karasek의 직무요구·통제 모형은 요구가 높고 재량이 낮은 직무에서 건강 위험이 커진다고 설명합니다. Siegrist의 노력·보상 불균형 모형은 투입한 노력에 비해 보상이 낮을 때의 위험을 설명합니다. 전 직원 측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 사례는 두 모형이 지목하는 조건, 곧 높은 업무 요구와 낮은 보상, 그리고 관계 때문에 거절하기 어려운 압력을 함께 갖추고 있습니다.
여기서 실무자가 특히 눈여겨볼 지점은 재해 이후의 단계입니다. 정신질환 산재에서는 산재 처리 과정 자체가 또 하나의 위험요인이 됩니다. 사업주의 의견서에 질병의 진위를 의심하는 표현이 들어가거나, 신청 대신 금전 합의가 제안되면 재해자는 이를 업무 관련성 부정을 넘어 인격적 부정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사업주가 사실관계를 소명할 권리는 보장되어야 하지만, 그 방식이 회복을 방해하지 않도록 설계하는 것은 조직의 몫입니다.
04.법적·제도적 근거와 공백
05.관리적·기술적 통제방안
통제방안은 소규모 제작사가 실제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아래 방안은 별도 인력 없이 시작할 수 있는 것부터 순서대로 배치했습니다.
06.현장 적용의 한계와 개선 전략
사업장 단위의 통제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합니다. 크리에이터 제작사에서는 대표가 출연자이자 최종 편집 책임자인 경우가 많아, 내부에서 대표의 결정을 견제할 구조가 생기기 어렵습니다. 근로시간 자동 집계는 목적과 범위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감시로 받아들여져 개인정보 보호법상 분쟁을 낳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수익을 배분하는 플랫폼과 협업 브랜드는 제작 노동의 조건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콘텐츠의 가치사슬에서 노동 조건을 점검하는 지점이 비어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개선 전략은 사업장 바깥의 지렛대를 함께 써야 합니다. 첫째, 공동구매와 간접광고 계약에 협력 제작사의 노동관계법 준수 조항을 넣는 방식으로 광고주와 협업 브랜드의 공급망 실사를 콘텐츠 분야로 확장할 수 있습니다. ESG 경영을 표방하는 브랜드라면 거부할 명분이 약합니다. 둘째, 한국콘텐츠진흥원 등 공공 지원사업의 선정 요건에 근로계약서 체결과 실근로시간 기록을 연계하면 비용 부담 없이 기준을 확산시킬 수 있습니다. 셋째, 소규모 크리에이터 제작사를 대상으로 표준근로계약서와 노무 컨설팅 바우처를 보급하고, 상시 4명 이하 사업장의 근로기준법 적용 범위에 관한 논의에 이 업종의 실태를 반영해야 합니다.
07.맺으며: 화면 뒤의 사람
콘텐츠는 화면 앞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지만, 그 화면은 대본을 쓰고 번역하고 편집하는 여러 사람의 시간으로 만들어집니다. 이번 사태의 사실관계가 어떻게 정리되든, 한 사람이 제작 전 공정을 떠안고 그 시간이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 구조는 다른 채널에서도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습니다.
콘텐츠 산업은 오랫동안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말로 노동의 값을 깎아 왔습니다. 방송에서는 꿈이, 게임에서는 성공 보상이, 크리에이터 산업에서는 친분과 동업의 언어가 그 역할을 했습니다. 열정과 관계가 장시간 노동을 정당화하는 연료로 쓰이는 한, 근로계약서와 근로시간 기록 같은 가장 기본적인 장치조차 ‘정 없는 요구’로 취급됩니다. 제도가 지켜 주지 못하는 빈틈을 개인의 인내로 메우는 구조가 바로 콘텐츠 노동을 이토록 연약하게 만든 원인입니다.
안전관리의 관점에서 이 사건은 아차사고가 아니라 이미 발생한 재해에 가깝습니다. 재해 조사의 목적이 처벌이 아니라 재발 방지에 있듯이, 지금 필요한 것은 특정인을 향한 공방보다 콘텐츠 제작 노동을 위험성평가의 대상으로 끌어들이는 일입니다. 방송 현장이 10년에 걸쳐 어렵게 확인한 원칙, 곧 계약의 형식이 노동의 실질을 가릴 수 없다는 원칙이 크리에이터 산업에서도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 엑스포츠뉴스, 「영화노조 “‘킹덤’ 스태프 사망,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과로사” 성명 발표」, 2018.01.17.
· 비즈한국, 「‘구로의 등대’ 넷마블에 탄생한 노조, 게임업계 ‘등대’ 될까」, 2024.05.07.
· 경향신문, 「임신부까지 야근시키는 ‘판교의 등대’… 게임업계는 노동법 무법지대」, 2022.10.06.
· 기자협회보, 「법원 “故이재학 PD는 CJB청주방송 노동자”」, 2021.05.
· 아시아경제, 청주방송 근로감독 결과 보도, 2021.04.26.
· 뉴시스, 「고용부 “故오요안나 괴롭힘 있었다” 결론」, 2025.05.19.
· 한국노동연구원, 『노동리뷰』 2025년 8월호, 노동포커스.
· 경인일보, 「영상편집자 절반, 최저임금 아래… 유튜브 전성시대, 프리랜서 그늘」, 2024.11.11.
· 경인일보, 「‘질병·일 관계 증명’ 인정 확률 4년새 더 낮아졌다」, 2026.
· 헤럴드경제, 「근로복지공단, 산재 처리 50.8일 단축」, 2026.
· 헤럴드경제, 「헤이지니 전 직원 폭로 “연봉 2000만원, 하루 16시간 일해”」, 2026.10.27.
· 헤럴드경제, 「헤이지니, 노동착취 논란 조목조목 반박」, 2026.10.27.
· 인사이트, 「헤이지니 2차 폭로 나왔다」, 2026.10.27.
· 세계일보, 「헤이지니, 전 직원과 산재 갈등 녹취 공개」, 2026.10.28.
· 파이낸셜뉴스, 「노동장관, 65세 정년연장·포괄임금 금지 연내 대응 예고」, 2026.10.13.
· 법무법인 율촌, 고용노동부 ‘포괄 임금 오남용 방지 지도 지침’ 관련 리걸 업데이트, 2026.
· 주간경향, 「드라마가 끝나면 스태프는 더 초조하다」, 2019.03.11.
· 데일리안, 「미디어 환경은 급변하는데… 프리랜서·비정규직에게만 더딘 변화」, 2022.01.13.
· 노컷뉴스, 「스태프 해고 논란 ‘미남당’ 결국 노동부 근로감독 行」, 2022.07.
· 한국노동연구원, 『노동리뷰』 2019년 10월호, 통계프리즘: 산업재해율 추이 및 현황.
· ISO 45001:2018, Occupational health and safety management systems.
· ISO 45003:2021, Psychological health and safety at work.
· Karasek, R. A. (1979). Job demands, job decision latitude, and mental strain. Administrative Science Quarterly, 24(2).
· Siegrist, J. (1996). Adverse health effects of high-effort/low-reward conditions. Journal of Occupational Health Psychology, 1(1).
· AI 재난안전전문가
· 무대안전관리사 (글로벌 프로젝트 포함)
· 전기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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