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불신은 성적표가 아니라 '기억'에서 온다
국민의 불신은 성적표가 아니라
'기억'에서 온다
키워드 정부 신뢰 · 집단적 기억 · 국가 개혁 · 진실규명 · 위험소통
01.신뢰는 두 개의 층으로 쌓인다
정부를 믿지 못한다는 말을 들으면 흔히 행정의 성과부터 떠올린다. 정책이 실패했거나 사고 대응이 늦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재난 현장에서 "안전하다"는 공식 발표가 나와도 시민들이 쉽게 안도하지 않는 장면은 개별 정책의 성패보다 오래된 경험에서 비롯된다.
스웨덴의 정치학자 보 로스스타인(Bo Rothstein)은 공공제도에 대한 신뢰가 개인의 합리적 계산만으로 형성되지 않으며, 사회가 공유하는 집단적 기억이 신뢰의 수준을 오랫동안 규정한다고 보았다. 이 관점에서 보면 신뢰에는 두 개의 층이 있다. 그 시점의 국정 운영에 대한 평가가 반영되는 성과 신뢰와, 국가가 불리한 사실도 스스로 말해 왔는가에 대한 축적된 판단인 제도 신뢰다. 이 구분은 필자의 분석 틀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1995년 저서 『트러스트(Trust)』에서 한국을 이탈리아, 프랑스 등과 함께 가족 바깥의 신뢰가 약한 저신뢰 사회 유형으로 분류한 바 있다. 지나친 일반화라는 비판도 있지만, 한국의 공적 신뢰가 오래전부터 국제적 관심의 대상이었음을 보여 준다.
실제로 OECD 공공부문 신뢰도 조사에서 한국의 중앙정부 신뢰도는 2024년 발표 당시 37.15%로 30개국 중 15위였으나, 2026년 6월 발표에서는 51.03%로 38개국 중 6위에 올랐다. 성과 신뢰는 이처럼 짧은 기간에도 크게 움직인다. 반면 위기 상황에서 국가의 발표를 믿고 즉시 행동할 수 있는지를 가르는 제도 신뢰는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의 기억 위에 쌓인다. 아래의 역사는 그 기억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여 준다.
자료: OECD Trust Survey 2024 Country Notes: Korea, 행정안전부 보도(2026.06.30)
02.시대별로 본 신뢰의 상실과 회복
신뢰를 잃은 기록만 나열하면 역사는 배신의 연대기가 되고, 개혁만 나열하면 미화가 된다. 두 흐름을 같은 시대 안에 나란히 놓고 보아야 공정한 평가에 가까워진다.
권위주의 시기제주4·3(1947~1954), 한강 인도교 폭파(1950), 실미도 사건(1971), 박종철 고문치사(1987)의 진상이 축소되거나 감춰졌다.6월 민주항쟁 이후 6·29 선언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국민에게 되돌렸다(1987).
표에서 드러나듯 배신과 회복은 특정 정권이나 시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다만 두 흐름에는 뚜렷한 차이가 하나 있다. 배신은 대개 위기의 한순간에 일어났지만, 회복은 수십 년에서 백 년에 걸친 제도화를 거쳐서야 효과를 냈다.
03.전근대: 백성의 신뢰를 제도로 만들려 한 시도
약속을 뒤집은 국가, 묻고 기다린 국가
1176년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가 봉기하자 고려 정부는 차별받던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키며 회유했다. 그러나 봉기가 잦아들자 정부는 진압으로 돌아섰고, 이에 망이 등은 이듬해 다시 일어섰다. 진압 이후 충순현은 다시 강등되었다. 국가가 스스로 한 약속을 거둬들인 이 기록은, 신뢰가 무너지는 가장 전형적인 경로를 보여 준다.
정반대의 사례도 있다. 세종은 1430년 토지세 제도인 공법을 바꾸기에 앞서 관료뿐 아니라 일반 농민까지 포함해 17만여 명의 의견을 물었다. 찬성이 더 많았지만 지역에 따라 반대가 거세자 곧바로 시행하지 않고 보완을 거듭해 1444년에야 확정했다. 결과보다 과정을 공개하고 반대 의견을 제도에 반영한 방식은 오늘날의 공론화 절차와 맞닿아 있다.
위기의 순간에 남은 기억
1592년 임진왜란 중 선조가 한양을 떠난 뒤 궁궐이 불탔다. 조선 측 기록은 성난 백성이 불을 질렀다고 적고 있으며, 원인을 두고는 학계에 이견이 있다. 다만 국왕이 백성보다 먼저 도성을 떠났다는 사실이 깊은 불신으로 기억되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적다.
백 년에 걸친 개혁, 대동법
조선 후기의 대동법은 회복의 노력이 어떤 조건에서 성공하는지를 보여 준다. 특산물을 현물로 바치는 공납은 중간에서 대신 납부하고 몇 배를 챙기는 방납의 폐단으로 백성의 부담을 키웠다. 대동법은 이를 토지 면적에 따라 쌀이나 베로 내도록 바꾸었다. 1608년 경기도에서 시작된 이 제도가 황해도까지 확대된 것은 1708년이었다. 땅을 많이 가진 계층의 반발로 100년이 걸렸지만, 왕이 바뀌어도 개혁의 방향이 유지되었다는 점이 제도를 정착시켰다.
04.현대: 위기의 순간 국가가 남긴 기억
1950년 6월 27일 새벽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을 떠났고, 정부는 시민들에게 동요하지 말라는 방송을 내보냈다. 이튿날 새벽 2시 30분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었고, 다리를 건너던 피란민이 희생되었다. 희생 규모는 지금도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다. 폭파 책임을 지고 처형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은 1964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대통령의 이동이 전시 지휘권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평가와, 시민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은 책임 회피였다는 평가가 지금도 맞서 있다.
1971년 실미도 사건은 사건 직후 '무장공비' 침투로 보도되었고, 공작원들은 오랫동안 '특수범'으로 불렸다. 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공작원 다수가 평범한 민간인이었다고 밝혔고, 2022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사형된 생존자 4명이 가족 통지 없이 암매장된 사실을 규명했다. 국방부 장관의 공식 사과는 사건 53년 만인 2024년 10월에 나왔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역시 치안본부가 쇼크사로 발표했으나 넉 달 만에 은폐 사실이 폭로되었고, 이는 6월 민주항쟁의 계기가 되었다.
자료: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2003), 경향신문(2024.10.15), 진실화해위원회(2022.08.24)
이 기억들이 공유하는 문장은 하나다. "국가는 불리한 정보를 늦게 말한다." 이 문장이 상식처럼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는 어떤 정부의 선의도 출발선에서부터 할인되어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이 문장은 권위주의 시기에만 머물지 않고, 민주화 이후의 대형 재난에서 다시 확인되었다.
05.현대: 신뢰를 되찾으려 한 개혁들
하나회 청산과 두 개의 실명제
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취임 11일째인 3월 8일 육군참모총장과 국군기무사령관을 전격 교체하며 군 내 사조직 하나회의 청산에 착수했다. 같은 해 대통령 자신의 재산을 공개하고 공직자윤리법을 개정해 고위공직자 재산공개를 제도화했다. 8월 12일에는 대통령 긴급재정경제명령으로 금융실명제를 시행했고, 국회는 일주일 뒤 이를 승인했다. 1995년에는 부동산실명제가 뒤따랐다.
주목할 점은 금융실명제가 한 정부의 착상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관련 법률은 1982년에 이미 제정되었지만 정치·경제적 논란으로 10년 넘게 시행이 미뤄졌다. 여러 정부에 걸쳐 준비된 제도가 결단을 만나 실행된 셈이다. 반대로 1997년 외환위기 속에서 금융소득 종합과세가 유예되는 등 개혁의 일부는 미완으로 남았다. 개혁이 지속되지 않으면 효과도 줄어든다는 점을 함께 보여 준다.
정부가 바뀌어도 이어진 제도들
1996년 제정된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은 국민이 국가에 정보를 요구할 권리를 법으로 명시했다. 2000년 제주4·3 특별법,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출범, 2016년 청탁금지법 시행도 같은 흐름에 있다. 사과 역시 정부의 성향과 무관하게 이어졌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4·3에 대해, 2024년 국방부 장관은 실미도 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했고, 2026년 8월에는 이재명 대통령이 제3기 진실화해위원회 출범을 계기로 국가폭력 피해자들에게 사과했다. 신뢰 회복은 한 정부의 업적이 아니라 여러 정부가 이어 달린 결과라는 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06.재난에서 무너진 신뢰, 재난에서 되찾은 신뢰
재난은 국가의 신뢰가 가장 빠르게 무너지는 순간이자, 가장 분명하게 회복되는 영역이기도 하다. 대피 명령, 재난문자, 방역 수칙은 모두 국민이 국가의 판단을 믿고 따른다는 전제 위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아래 네 사례는 실패와 그 이후의 조치를 함께 놓고 본 것이다.
2014당일 오전 '전원 구조' 보도가 퍼졌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오후 368명 구조를 발표했다가 착오를 인정했다. 최종적으로 304명이 숨지거나 실종되었다.국민안전처 신설(2014.11)로 재난 대응 조직을 재편했고, 두 차례의 특별조사위원회(2015~2016, 2018~2022)가 활동했다. 진상규명의 충분성에 대해서는 지금도 평가가 엇갈린다.
2015첫 환자 발생 18일 동안 병원명을 공개하지 않았고, 최종 186명 확진, 38명 사망으로 집계되었다.감염병예방법 제34조의2 신설로 감염병 위기 시 정보공개를 의무화하고 방역체계를 개편했다. 이는 코로나19 초기 이동경로 공개의 근거가 되었으며, 사생활 침해 논란에 따라 공개 기준도 함께 정비되었다.
2016관측 이래 최대인 규모 5.8 지진에서 재난문자와 지진정보 알림이 늦었다는 비판이 집중되었다.지진조기경보 발표 시간을 50초 이내(2015)에서 5~10초(2021)로 줄였고, 2026년 5월부터는 진앙 인근에 3~5초 안에 알리는 지진현장경보를 시행하고 있다.
2024~ 진행 중179명이 숨졌다. 감사원은 2026년 3월 공사비 절감을 위한 콘크리트 둔덕 설치와 8개 공항 14개 부적합 방위각 시설의 승인을 지적했다. 최종보고서는 2026년 6월로 제시된 시한을 넘겼다.7개 공항 9개 방위각 시설 개선을 추진해 2025년 말까지 5개소를 완료했다. 2026년 1월 국회 국정조사 결과보고서가 채택되었고, 2월에는 사고조사위원회를 국토교통부에서 국무총리 소속으로 옮겨 조사의 독립성을 보완했다.
세월호: 발표와 현실의 간극
세월호 참사에서 국민의 신뢰를 결정적으로 무너뜨린 것은 침몰 그 자체만이 아니었다. 사고 당일 오전 '전원 구조'라는 보도가 퍼졌고, 오후에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368명을 구조했다고 발표했다가 집계 착오를 인정했다. 생존자는 172명이었다. 가족들이 처음 들은 희망의 숫자와 실제 결과 사이의 간극은 그 자체로 깊은 상처가 되었다. 오보의 1차 출처가 행정기관인지 언론인지를 따지기 이전에, 국민은 '국가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아산정책연구원 조사에서 중앙정부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2013년 6월 34.9%에서 참사 석 달 뒤인 2014년 7월 24.3%로 떨어졌다.
자료: 아산정책연구원, 기관 신뢰도 여론조사(2014.07)
이후 국가는 재난 대응 조직을 재편하고 두 차례의 특별조사위원회를 운영했다. 여객선 안전관리와 재난 대응 체계에도 여러 개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조사 과정의 갈등과 결론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이어지면서, 제도 개선의 성과와 신뢰 회복의 정도가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았다. 제도는 바뀌었지만, 무엇이 왜 실패했는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이 세월호가 남긴 과제다.
무안공항: 아직 끝나지 않은 시험대
2024년 12월 29일 무안국제공항에서 발생한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는 179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원인 조사는 아직 진행 중이므로 이 글은 사고 원인을 단정하지 않는다. 다만 신뢰의 관점에서 확인되는 사실들이 있다.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는 국회에서 약속한 2026년 6월의 최종보고서 시한을 지키지 못했고, 2026년 8월에는 참사 직후 방위각 시설 관련 보도자료를 사실과 다르게 작성·배포한 혐의로 국토교통부 공무원들이 검찰에 송치되었다. 송치는 혐의 단계이며 사법적 판단은 남아 있다. 이보다 앞선 2026년 3월 감사원은 국토교통부가 토공사 비용을 줄이려 무안공항에 높이 2.4m의 콘크리트 둔덕을 설치했고, 김해·제주를 포함한 8개 공항에서 국제기준에 맞지 않는 방위각 시설 14곳을 승인해 왔다고 지적했다. 국토부는 감사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고 후속 조치를 하겠다고 밝혔다.
반대 방향의 노력도 분명히 있었다. 정부는 참사 한 달도 되지 않아 전국 공항의 방위각 시설을 전수 점검하고 7개 공항 9개 시설을 개선 대상으로 공개했으며, 국토교통부 발표에 따르면 2025년 말까지 이 중 5개소의 개선이 끝났다. 다만 연내 완료라는 당초 약속에는 미치지 못했고, 무안공항 시설은 유족과의 협의를 거쳐 착공하기로 했다. 제도 면에서는 2026년 1월 국회 국정조사 결과보고서가 채택되었고, 같은 해 2월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가 국토교통부에서 국무총리 소속으로 이관되었다. 조사 대상인 부처가 조사기구를 거느리던 구조적 모순을 해소하려는 조치다. 새 조사위원회는 유족에게 소통 부족을 인정하고 매달 정례 간담회를 열어 조사 진행 상황을 설명하겠다고 밝혔다. 이 약속들이 일정대로 이행되는지, 조사 결과가 투명하게 공개되는지가 앞으로 이 참사가 '또 하나의 배신'으로 기억될지, '신뢰를 회복한 사례'로 기억될지를 가를 것이다.
자료: 국토교통부 발표(2025.12.31), 확인 가능한 최근 발표 기준이며 2026년 이후 공정은 반영되지 않았을 수 있음
재난에서 확인된 회복의 조건
네 사례를 나란히 놓으면 하나의 경향이 보인다. 신뢰는 사고 그 자체보다 사고 직후 국가가 정보를 다루는 방식에서 더 크게 갈렸다. 그리고 회복은 사고 이후의 사과보다, 다음 재난이 오기 전에 미리 갖춰 둔 제도에서 확인되었다. 메르스 이후의 정보공개 의무화가 코로나19 초기 대응의 기반이 되었고, 경주 지진 이후 줄어든 경보 시간은 다음 지진에서 국민이 대피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국가가 신뢰를 되찾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다음 재난에서 약속한 성능을 보여 주는 것이다.
자료: 기상청 보도자료(2023.12.22), 지진경보 체계 개편 보도(2026.05)
07.해외 기관·언론과 연구는 어떻게 보았나
신뢰의 문제는 국내의 시각만으로 판단하면 진영의 언어에 갇히기 쉽다. 국제기구와 해외 언론, 학술 연구의 평가를 함께 보면 한국 국가의 실패와 회복이 어떻게 읽혔는지 보다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평가는 비판과 긍정이 함께 있었다.
2015.6메르스투명하고 신속한 정보 배포에 실패한 점을 확산 요인으로 지목했다. 마거릿 찬 WHO 사무총장은 초기 대응이 느렸지만 이후의 역학조사는 세계적 수준이었다고 함께 평가했다.
옥스퍼드대 연계 연구 플랫폼, 2020코로나19한국이 메르스의 교훈을 바탕으로 이른 시기에 강력하게 대응했고, 메르스의 아픈 기억이 국민의 방역 협조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2020메르스와 코로나19메르스 당시의 투명성 부족이 정부 신뢰를 훼손했으나, 이후의 법·제도 개편으로 한국이 감염병의 확산국에서 차단국으로 바뀌었다고 평가했다.
2024.12무안공항 참사활주로 끝에 단단한 둔덕을 둔 설계가 업계의 모범 관행에 맞지 않으며, 피해를 키운 결정적 요인이 되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Reuters는 2026년 3월 감사원의 부적합 승인 지적도 상세히 보도했다.
미국, 2014세월호 이후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인의 정부 신뢰가 크게 낮아졌다고 보도하며 후쿠야마의 저신뢰 사회론을 함께 소개했다.
2024, 2026중앙정부 신뢰37.15%(30개국 중 15위)에서 51.03%(38개국 중 6위)로 상승했다. 불만 제기 시 공공서비스가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는 2024년 조사에서도 OECD 평균보다 높았다.
연구가 말하는 신뢰의 조건
위험소통 분야의 고전적 연구인 피터스·코벨로·매컬럼(Peters, Covello & McCallum, 1997)은 위험 정보를 전달하는 기관에 대한 신뢰가 전문성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그 기관이 개방적이고 정직하며 시민의 안전을 진심으로 걱정한다고 느껴지는지에 크게 좌우된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보였다. 메르스와 세월호에서 무너진 것이 바로 이 개방성과 정직성에 대한 인식이었다.
한편 세월호 참사를 다룬 2019년 『Journal of Public Affairs』의 연구는 시민이 어떤 성향의 언론에 노출되었는지에 따라 참사의 책임 소재 판단과 정부 신뢰가 양극화되었다고 분석했다. 불신은 국가의 행위만이 아니라 정보가 유통되는 환경에 의해서도 증폭된다는 뜻이다. 신뢰 회복이 정부의 노력만으로 완성되지 않고, 사실을 공유하는 사회적 기반을 함께 다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해외의 평가를 종합하면 하나의 일관된 흐름이 보인다. 한국 국가는 결정적인 순간에 정보를 늦게 내놓아 신뢰를 잃었고, 그 실패를 제도로 바꾼 분야에서는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성과를 냈다. 실패와 회복이 모두 '정보를 어떻게 다루었는가'에서 갈렸다는 점은 국내외 평가가 일치한다.
08.문화가 기억을 만든다
기억은 문화로도 전해진다. 2003년 영화 「실미도」는 천만 관객을 넘기며 잊혀 있던 사건을 사회적 의제로 끌어올렸지만, 공작원을 사형수와 중범죄자로 그린 설정은 이후 조사에서 확인된 사실과 달랐다. 최근 이 영화에는 해당 묘사가 사실과 다르다는 안내 자막이 붙었다. 문화예술은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는 힘과 함께 사실과 다른 인식을 굳히는 힘도 가진다. 정정된 사실이 사회의 기억에까지 닿으려면 기록과 교육, 문화 콘텐츠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09.신뢰 회복을 위한 네 가지 제언
역사에서 효과를 낸 개혁의 공통점은 공개, 숙의, 지속이었다. 이를 오늘의 제도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10.맺으며
국가는 세금을 걷고, 병역을 요구하고, 위기 때는 국민의 이동과 생활을 제한한다. 이 모든 권한은 국민이 국가를 믿는다는 전제 위에서만 정당성을 얻는다. 신뢰를 잃은 국가는 명령할 수는 있어도 동의를 얻기 어렵다.
반론도 있다. 국가에 대한 일정한 불신은 민주주의의 건강한 감시 기능이며, 재난 이후의 제도 개선이 실제로 지진 경보와 방역 성과로 이어졌듯 한국 국가는 실패에서 배워 왔다는 견해다. 실미도와 형제복지원의 진실이 결국 국가기구의 조사로 규명되었다는 사실도 교정 장치가 작동한다는 증거다. 필자도 동의한다. 다만 그렇기에 교정은 수십 년이 아니라 수년 안에, 피해자가 살아 있는 동안 이루어져야 한다.
대동법이 백 년에 걸쳐 자리 잡았듯, 신뢰도 한 정부의 임기 안에 회복되지 않는다. 불리한 사실을 먼저 말하는 경험이 정부를 넘어 이어질 때, 신뢰는 비로소 국가가 위기 앞에서 기댈 수 있는 자산이 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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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실록』 세종 12년(1430) 공법 찬반 조사 기사,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1592) 기사.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동법·임술농민봉기 항목.
·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2003.
·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실미도 사건 진상조사 결과 발표, 200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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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실미도 부대 사건' 53년 만에 국방부 장관 공식 사과」, 202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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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정안전부, 2026 OECD 공공부문 신뢰도 조사 결과 발표, 2026.06.30.
· 뉴스타파, 메르스 병원명 공개 지연 및 경유 병원 발언 관련 보도, 2015.06.
· 연합뉴스, 「여객선 침몰 290여 명 생사불명, 구조인원 368명 발표는 착오」, 2014.04.16.
· 기상청 보도자료, 「지진 발표 시간 10초 벽을 깨다」, 2023.12.22.
· 뉴스핌, 경주지진 10년 지진방재 워크숍 보도, 2026.09.09.
· 경북매일, 국토교통부 「방위각 시설 등 공항시설 안전 개선방안」 보도, 2025.01.22.
· 뉴스토마토, 제주항공 참사 1년 방위각 시설 개선 진행 상황 보도, 2025.11.11.
· 국토교통부 발표, 전국 5개 공항 5개소 방위각시설 개선공사 완료(언론 보도 종합), 2025.12.31.
· 국회 12·29 여객기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 국정조사 결과보고서 채택, 2026.01.27.
· 12·29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유가족협의회,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 국무총리 소속 이관 관련 입장문(언론 보도), 2026.02.28.
· 시사IN, 「제주항공 참사 1년6개월,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2026.07.
· 세이프타임즈,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장 유가족 간담회 보도, 2026.08.
· 투데이코리아, 무안공항 참사 국토부 공무원 송치 및 조사 진행 단계 보도, 2026.08.27.
· 매일신문, 한강 인도교 폭파와 최창식 대령 재심 무죄 관련 보도,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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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O, Statement on the ninth meeting of the IHR Emergency Committee regarding MERS-CoV, 2015.06.17. 및 한국·WHO 합동평가단 기자회견 보도(The Boston Globe), 2015.06.13.
· Our World in Data, Emerging COVID-19 success story: South Korea learned the lessons of MERS, 2020.
· The Regulatory Review(University of Pennsylvania), South Korea's Success Against COVID-19, 2020.05.14.
· NBC News, After Sewol Ferry Disaster, Koreans Lower Trust in Government, 2014.
· Reuters, South Korean airport embankment in focus after deadly Jeju Air crash, 2024.12.31.
· Reuters, South Korea finds faulty approvals at airport where Jeju Air plane crashed, 2026.03.11.
· AI 재난안전전문가
· 무대안전관리사 (글로벌 프로젝트 포함)
· 전기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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